김자수

HUFS경기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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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金自粹)[편집]


이름(한자)[편집]

김자수(金自粹)

생물 연도[편집]

1350(충정왕 2)∼1405(태종 5)

주요 내용[편집]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字)는 순중(純仲), 호(號)는 상촌(桑村). 아버지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오(오40)이다.


  • 생애

이름을 자수(自粹)라고도 하는데, 자는 순중(純仲·純中)이고, 호는 상촌(桑村)·상림(桑林)이다. 본관은 경주(慶州)로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교유하였다. 1374년(공민왕 23) 과거에 급제하고, 덕령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다. 우왕 때 한때 유배 생활을 하였으나 뒤에 복직되고, 공양왕 때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을 지냈다. 그 후 좌상시를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안동(安東)에 은거하였다. 조선 태종 때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자결하였다. [1]

  • 사상

그는 효(孝)와 충의(忠義)로 이름났는데, 자결하기 전에 탄식하여 말하기를 "신하가 된 자는 나라가 망하면 따라 죽는 것이 의(義)이다. 나는 평생 충효로써 면려(勉勵)해 왔으니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한편 그는 고려 말 일어난 척불숭유(斥佛崇儒) 운동에 앞장섰으며, 공양왕 때 그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온건한 논조로 척불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천변(天變)이 자주 일어나는 것과 관련하여 숭불(崇佛)의 폐해를 지적하였으며, 당시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重修)를 많이 벌임으로써 백성들에게 번거로운 토목 공사의 부담을 준다고 비판하여 "복(福)을 비는 것은 우선 산 사람을 위한 것일텐데 복을 비는 행위가 산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화(禍)를 주게 되니 백성의 부모된 이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상소하였다. 이 척불운동은 김초(金貂)·박초(朴礎)·정도전(鄭道傳) 등에게로 가서 더욱 강하게 일게 되었다.[2]

출처[편집]

  1. 신종우,「김자수」,<http://www.shinjongwoo.co.kr/>,2016.06.02
  2. 신종우,「김자수」,<http://www.shinjongwoo.co.kr/>,2016.06.02